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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적인 순간이 있는 환기미술관
등록 : 2023-01-18 19:19
임태희의 건축탐방


화이트 큐브 공간을 둘러싼 계단에 선 임태희 소장.

임태희의 건축 탐방 6 - 환기미술관

극적인 내러티브가 있는 뮤지엄 건축

눈밭이 흩날리면 세상이 하얀 겨울로 바뀔 때 부암동의 환기미술관에 가본적이 있는가. 작품과 공간, 일상의 동네 풍경이 몽환적으로 오버랩되며 극적인 순간을 만들어 낸다.

환기미술관은 수직적인 건축 요소가 많지만 차갑지 않고 따뜻한 느낌을 준다.

눈이 오면 자연히 떠오르는 장소가 있다. 눈 오는 풍경이 매우 아름답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눈 오는 날의 장사진 도로를 아찔하게 온몸으로 경험했던 2가지 기억이 공존하는 환기미술관이다. 그날은 참으로 묘했다. 

마침 근처에서 프로젝트를 하고 있어 회의를 마치고 나서는데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 거다. 그 순간 문득 환기미술관이 생각났다. '눈이 오는 낭만적인 날, 혼자만의 환기미술관에 가자!' 그렇게 되었다. 그날의 환기미술관은 정말 좋았다.

보통의 미술관이라면 내부에 창을 엄격히 제한하기 마련인데, 환기미술관은 전시실과 전시실을 이어주는 사이 공간에서 바깥을 조망할 수 있도록 설게 되어 있다. 특히 3층의 전시실 사이 계단을 올라가면 2개의 돔 지붕 사이에 세로로 기다랗게 난 창문을 마주하게 되는데, 날이 흐리면 창문의 블라인드를 치지 않기 때문에 산과 하늘, 부암동의 동네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다.

소복하게 눈이 내렸던 그날, 창문 너머로 어슴푸레하게 보이는 부암동의 하야 겨울은 공간과 공간 사이 경계를 희미하게 지우고 컬러감이 강한 김환기 선생의 작품과 오버랩되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환기미술관은 한국과 미국에서 활발하게 활동한 건축가 우규승이 설계한 시립미술관이다.
임태희 소장은 3층 전시실에서 작품 사이로 볼 수 있는 동네 풍경을 극적인 요소로 손 꼽았다.

이렇게 호사로운 풍경이라니!

문제는 귀갓길이었다. 당시는 미술관 내에 주차가 되지 않아 미술관 바로 앞 경사면에 차를 세웠는데, 시동을 걸고 액셀을 밟았더니 차가 쭈욱 미끄러지는 것이 아닌가.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미끄러지는 차 안에서 입고 있던 겨울옷이 흠뻑 젖어버릴 만큼, 아찔한 위기감을 느꼈다.

환기미술관이 급경사 위에 지어졌다는 것을 그때 몸으로 기억하게 되었다.(대지의 급경사는 환기미술관의 공간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로 작용한다.) 경사진 대지에 앉힌 본관은 수줍은 듯이 고개를 돌리고 있는데 이 겸손한 모습이 부암동의 동네 풍경과 참 조화롭다.

오르막길을 따라 들어서는 본관 내부 공간은 어떤 이야기의 내러티브가 전개되는 것처럼 극적인 양상을 띤다. 입구부터 작게 분절된 공간을 지나면 실내 정원이 연상되는 화이트 큐브 공간을 만나게 되는데, 크기로만 따지면 아담한 것 같지만 충고가 무려 3층 높이인 데다 공간을 둘러싼 벽과 기둥이 매우 수직적이어서 서양 건축사에 등장하는 건축 양식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면서도 어디에선가 들어오는 자연 채광이 전시실을 매우 따뜻하게 만들어 준다. 얼마나 절묘한가. 화이트 큐브 공간을 사방으로 둘러싼 계단을 올라가다가 고개를 빼고 아래를 내려다보면 공간과 작품, 문득문득 등장하는 관람객이 재미있고 역동적인 움직임을 만들어 낸다.

그 사이로 3층의 전시실에서 비로소 마주할 수 있는 차경은 급경사지가 아니면 존재하기 어려운 내러티브이기도 하다.

환기미술관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평면도를 보면 1층에서 3층까지의 도면이 한 건물이라고 유추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 미술관에 직접 가보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도면일 것이다.

환기미술관의 시그니처인 2개의 돔 지붕. 절제된 형태에서 기하학적인 질서와 균형이 느껴진다.

나는 이 경험을 마치 산속에 있는 사찰에 가기 위해 굽이진 산길을 올라가다 보면 어느 사이에 도착한 정상의 정자에 서서 충경을 관조하면 한숨 돌리는 것과 유사하다고 비유하고 싶다. 그러고 보니 나도 조금 힘들고 지쳐서 잠시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 들 때면, 환기미술관에 오곤 했다.

좋은 크기를 수치로 측량할 수는 없지만, 환기미술관에 오면 너무 크지도 않고 너무 작지도 않은 그런 아늑함이 좋았다. 어떤 곳은 방 한 칸에 오롯이 있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어떤 곳은 대청마루처럼 누워 있으면 시원한 바람이 불 것만 같은 공간도 있다.

어떤 공간은 산속 깊은 곳에 있는 정자에 오른 기분이 들기도 한다. 재미있는 것은 스케일이나 구성적인 면에서는 매우 한국적이지만 공간의 비례를 보면 지극히 서양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긴환기 선생이 말년 뉴욕에서 거주하며 왕성한 작업 활동을 했고, 그러던 와중에 건축가 우규승을 만나 교류했던 세월의 영향이 크지 않을까 짐작만 해볼 따름이다.

김환기 선생의 사후에 건축가 우규승은 김향안 여사의 의뢰를 받아 환기미술관을 설계했으며 김향안 여사는 한국 예술계에 한 획을 그은 걸출한 세기의 화가를 위해 최고를 고집하며 미술관을 채웠다.

두 사람이 생전에 나눈 정다운 이야기가 미술관 곳곳에 추억으로 자리하고 있다. 몰랐으면 모를까, 알고 나니 애틋하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사랑의 감정이 미술관에 넘실대는 듯하다. 한 남자를, 한 예술가를, 한 세월을 사랑하였던 여인의 안목과 통찰력, 의지가 만들어낸 단단하고 섬세한 건축물의 위대함이란, 30년 세월을 넘어 현대인의 사랑을 받아 마땅하지 않은가.

대지의 경사진 특성을 이용해 계단을 적극 활용한 환기미술관. 공간의 레이어가 겹겹이 쌓여 확장되는 느낌이 인상적이다.
임태희는
임태희 디자인스튜디오의 수장으로 공간 디자인이라는 작업을 통해 삶을 관찰하며 그 행위를 통해 배움과 깨달음을 얻고 있다. 가시적인 것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중사하고, 마음을 움직이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어른스러운 미학을 탐구하며 대표 작업으로 북촌의 한지문화산업센터, 앨리웨이광교의 두수고방, 고창의 상하농원, 온양민속박물관의 카페 등을 디자인했다.
출처:https://v.daum.net/v/20230118191158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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