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은 우주만물의 생성과 변화를 함축하는 책이다. 그런데 이 변화의 원리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 역유태극易有太極이라. 변역變易과 불역不易의 아이러니야말로 주역이 초월적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 근거이다. 구체적인 형상이나 언어는 이러한 모순을 해결할 수 없으므로 주역은 구체적인 형상을 벗어난 초월적 상(象外之象)으로서 괘卦를 드러낸다. 이로써 하나의 괘에 변變과 불변不變을 동시에 담아낼 수 있는 것이다.
이후 주역은 자연과 인간, 세계를 아우르는 최고의 형이상학적 체계를 반영하면서 수많은 철학사상가들의 연구주제가 되었다. 아울러 예술적 측면에서 보더라도 연속된, 혹은 단절된 여섯 개의 선으로 구성된 64개의 괘상은 이미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조형적 미감을 가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누구도 괘상 자체를 예술적으로 표현하려는 시도를 하지 못했다. 이는 각각의 괘가 지니고 있는 의미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대 예술의 주요 흐름 가운데 하나는 본질로의 환원, 혹은 회귀이다. 이는 작가의 의식을 포함한 모든 외부적인 요인을 철저히 배제하고 직접적이고 단순한 방식의 표현으로 대상 자체의 순수한 미적 가치를 드러내려는 것이다. 외형적 형태만을 보면 이번에 전시된 작품들은 자연스럽게 이러한 사조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양자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두꺼운 평붓을 사용하여 아무 변화 없이 담담하게 그려내는 필선은 평면의 효과를 극대화하지만 이는 작가의 의식을 배제하고 대상의 미적 본질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작가의 의식을 무한히 확장하여 세계(자연)의 본질과 연결시키고 나아가 진眞·선善·미美가 서로 합일되는 동양미학의 궁극적 이상을 실현하려는 것이다. 세부적으로는 먹의 농담을 활용하여 필선을 중첩시키고, 번짐 효과를 극대화하여 상호연관성과 변화의 필연적 흐름을 드러낸다. 때로 이질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하는 여백餘白의 배치와 획을 세우는 파격을 통해 평면을 입체적 공간으로 확장하고 있으며, 각 괘상이 함유하고 있는 본질적 의미(내용)를 강조함으로써 감상자로 하여금 저절로 그 기운氣韻에 동화되도록 한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작가만의 전유물도 아니요, 감상자의 특권도 아니다. 작품을 통해 작가와 감상자의 기운이 공명을 일으키고, 그 파장이 울림이 되어 공간을 가득 채울 때 비로소 이해와 공감의 상호작용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파격적이고 새로운 시도인 만큼 때로 감상자의 마음을 불편하게 할 수도 있겠으나 마음을 열고 전체를 관조한다면 공간의 울림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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