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 설치, 영상, 사진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드는 허명욱 작가의 작품 세계를 보여주는 이번 전시에서 그의 옻칠화 신작 10여 점이 소개된다.
갤러리에 들어서 작품을 보면 ‘단색화’가 먼저 연상된다. 그러나 전시된 그림들은 캔버스에 물감을 덧칠해 그린 단색화와 조금 다르다. 옻이 물감 대신 칠해졌고, 캔버스가 아닌 금속화판이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 갤러리 아라리오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허명욱 개인전 ‘칠하다’의 전시장에 가면 만날 수 있는 작품들이다.
서울과학기술대에서 금속공예를 전공한 작가는 그동안 회화, 설치, 영상, 사진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시간’을 주제로 한 작업을 펼쳐왔다. 이번 전시도 역시 ‘시간’이 주제로 금속화판 위에 무수히 반복해 옻이 칠해진 그림을 통해 ‘시간의 중첩성’을 표현하고 있다.
전시작 10여 점은 모두 화면이 위아래로 나뉘어 있다. 나뉜 경계에는 덧칠이 되는 과정에 불룩하게 만들어진 선이 있다. 작가는 이 선에 대해 “선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동안 무슨 색깔의 물감을 발랐는지 알 수 있다”며 “마치 일기장을 되돌려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특히 양분된 그림의 표면이 한쪽은 반질반질하거나 금박이 입혀 있고, 다른 한쪽은 채색하기 전 밑바탕에 깐 삼베 천을 벗겨내 일부러 거친 느낌이 나도록 연출돼 있는데 거친 쪽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라져 가는 것들을, 반질반질한 쪽은 변치 않는 영원을 표현하려 한 것이다.
작가가 전달하고 싶은 ‘시간의 무게’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작품 제작과정에 대한 이해가 선결돼야 한다. 작가는 작품을 위해 1년 내내 30도 이상의 온도와 70%의 습도를
유지한, 고온다습한 실내환경에서 ‘생칠’에서부터 수십 번의 ‘흑칠’을 한다. 작품 한 점에 서너 달이 걸린다.
그의 작품에서 단색화를 보았을 때와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은 작가의 작업과정이 물성과 주체, 화폭과 자아의 합일을 이루는 수행과정을 통해 그림 한 점이 만들어지는 단색화의 작업방식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미술평론가 서성록은 “허명욱은 수도자를 방불케 하는 ‘수행성’으로 자아를 부단히 깎고, 다듬고, 정제시켜가는데 이는 옻이 물감과 달리 건조시키는 데 장시간이 소요되고 그 같은 옻칠을 보통 40번 이상 해 그림이 완성되기 때문”이라며 “그것은 ‘내려놓음’을 뜻하는 방하착(放下着)저의 태도랄까, 무념의 마음가짐에서 비롯된 작업태도를 유지해야만 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전시장에는 평면회화뿐 아니라, 작가가 성찰한 시간성이 하나의 독창적인 회화 표현으로 전개되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영상도 함께 공개된다. 갤러리의 또 다른 층에는 폭 30㎝가량 되는 옻칠 용기 수백 개로 만들어진 설치작품도 전시돼 있다. 제각기 다른 성별, 직업, 연령을 가진 국내외 180여 명의 손에 의해 닳고 때가 묻어 돌아온 옻칠함과 함께 자연에 의해 마모된 옻칠함이 함께 섞여 초기 작업부터 지속된 ‘시간’에 대한 작가의 통찰을 엿보게 해준다. 전시는 12월 4일까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