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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최대의 수치" 원로 고고학자의 뼈아픈 반성
등록 : 2026-11-04 19:40
[한국의 유물유적] 백제를 다시 위대하게 만든 '왕과 왕비의 황금유물'
▲  국보 무령왕 금제관식(좌)과 무령왕비 금제관식(우). 2007년 성분분석 결과 순금 함유량이 99.9%(24K)로 밝혀졌다
ⓒ 국가유산청

흔히들 역사는 수많은 우연과 필연들이 끊임없이 교차하면서 첩첩이 쌓이고 누적되어 가는 거대한 시간의 흐름이라고 한다. 20세기 영국의 역사학자 E.H. 카(Edward Hallett Carr 1892~1982)는 역사란 필연적인 과정뿐만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우연의 개입도 함께 겪으며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비록 겉으로는 우연처럼 보이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거대한 인과관계와 필연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의 속성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인류의 수많은 문화유산 역시 겉보기에는 완벽한 '우연'으로 발견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역사의 도도한 흐름, 그리고 원인과 결과가 맞물린 서사 속에서 필연적으로 만들어져 후대에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위대한 역사의 순간들은 가끔 '우연'이라는 가면을 쓰고 불쑥 나타나기도 한다. 1974년 중국 시안에서 가뭄에 시달리던 농부들이 우물을 파다가 진시황 무덤의 '병마용갱'을 우연히 발견했다. 16세기말 운하공사를 하던 건축가가 로마의 벽화와 함께 발견한 화산재 속에 박제된 이탈리아 고대 도시 '폼페이'도 그런 경우다.

우리 문화유산 중에도 '우연한 발견'이라는 극적인 순간을 거쳐 당시의 '역사적 필연'을 잘 설명해 주는 유물들이 있다.

위대하지만 최악의 발굴, 백제 무령왕릉

▲  1971년 여름. 충남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서 배수로 공사 중 우연히 발견된 백제 25대 무령왕과 왕비의 합장 릉. 삼국시대 왕릉급 무덤 중에서 신원이 밝혀진 유일한 무덤이다
ⓒ 국가유산청

1971년 7월 5일. 한국 고고학 사상 가장 '위대한 발견'이자 동시에 '최악의 발굴'이라는 불명예의 서막이 열린 날이었다. 대한민국 사적으로 지정된 충청남도 공주의 '송산리 고분군'은 백제의 왕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백제의 두 번째 수도였던 웅진(공주)에는 그날도 장맛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해마다 장마철이 되면 고분군 무덤 안에 빗물이 스며들어 벽화가 훼손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일본인들에게 심하게 도굴 당한 6호분은 정도가 심했다. 벽면 사방에 그려진 '사신도(四神圖)'를 보호하기 위한 배수로 작업을 진행했다.

5호분과 6호분 무덤 주위를 파던 인부의 삽날에 딱딱한 무언가가 걸렸다. 주변을 조금 더 파헤치자 옆으로 가지런히 놓인 벽돌들이 드러났다. 배수로 공사는 중단되었고 상부에 급보가 전해졌다. 이틀 뒤 7월 7일, 김원룡 국립중앙박물관장이 이끄는 합동 조사단이 현장에 도착했다.

▲  벽돌로 촘촘히 막혀있는 무덤 입구. 벽돌을 빼내자 안에서 하얀 김이 서린 서늘한 공기가 새어 나왔다
ⓒ 국립문화유산연구원

조심스럽게 벽돌 출토 지점 주위를 파내려 갔다. 조금 더 파헤치자 벽돌들이 촘촘하게 막고 있는 아치 형태의 무덤방 입구 단면이 드러났다. 옆에 있는 6호분과 똑같이 중국 남조(양나라)의 영향을 받은 '벽돌무덤' 양식이었다. 거의 모든 고분들이 일제강점기 시대 도굴꾼들을 피할 수 없었지만 이 무덤만큼은 단 한 번도 도굴꾼의 손길이 닿지 않은 온전한 상태였다. 천운이었다.

백제의 전통적 무덤양식은 석곽 위에 돌을 쌓은 '돌무지무덤'에서 무덤방과 문이 따로 있는 '굴식돌방무덤'으로 점차 변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 무덤은 특이하게도 중국 남조 양나라 영향을 받아 벽돌을 쌓아 무덤방을 만든 전축분 형식이었다.

또한 시신을 안치한 목관은 일본 열도 남부에서 자생하는 금송(소나무과)으로 제작됐음이 드러났다. 백제의 독창성을 바탕으로 중국 남조와 왜(일본)의 기술까지 동원된 동아시아 3국의 문화가 집약된 무덤이었다.

▲  무령왕릉 내부. 중국 양나라의 영향을 받은 벽돌무덤(전축분) 양식이다
ⓒ 국가유산청

무덤 속으로 한걸음 더 들어가 보자. 떨리는 손으로 무덤 입구 벽돌을 빼냈다. 순간, 안쪽에서 하얀 김이 서린 서늘한 공기가 새어 나왔다. 무덤 천장을 파고 내려온 나무뿌리를 헤치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무덤방 입구 널길에 들어서자마자 머리에 철재 뿔이 달린 돌짐승 한 마리가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고 있었다.

무덤을 악귀로부터 지키고 죽은 이의 영혼을 인도하기 위해 안치한 '진묘수(鎮墓獸)'였다. 무덤을 지키는 진묘수 앞에는 엽전 꾸러미와 무덤 주인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묘지석(墓誌石)'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묘지석에는 '영동대장군백제사마왕(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이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사마왕이 누구일까. '사마(斯麻)'는 백제 무령왕의 생전 이름이고 '영동대장군'은 521년 중국 양나라에서 책봉해 준 관작이었다. 백제 제25대 무령왕과 왕비가 1500년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왕과 왕비의 역사적 귀환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무령왕릉은 삼국시대 왕릉급 무덤 중에서 주인의 신원이 확실하게 밝혀진 유일한 무덤이다.

▲  무덤방 입구에 들어서자 머리에 철재뿔이 달린 돌짐승(진묘수)이 노려보고 있었다. 그 앞에 두 장의 묘지석과 묘지석 위에 동전 꾸러미가 놓여 있다
ⓒ 국립문화유산연구원

▲  국보로 지정된 진묘수. 진묘수는 무덤을 악귀로부터 지키고 죽은 이의 영혼을 인도하기 위해 무덤 속에 안치한 상상의 동물이다
ⓒ 국가유산청

묘지석을 좀 더 살펴보자.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은 62세로 계묘년(523년) 5월 7일 돌아가셔서 525년 8월 12일 개장하고 대묘에 모셨다"라고 명기돼 있다. 이 기록은 <삼국사기>의 기록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왕비의 지석에는 1년 뒤 왕비도 사망했다고 새겨져 있다. 또한 지하에 있는 땅의 신에게 돈 1만 문을 주고 땅을 사서 무덤을 쓴다는 내용도 담겨있다.

묘지석을 보면 무령왕은 승하 후 2년 3개월 동안 다른 '빈전(殯殿)'에 모셔져 있다가 정식 왕릉으로 이장했다. 왕비 역시 사망하고 2년 3개월이 지난 후에 왕릉에 합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무령왕릉의 발굴은 광복 이후 '가장 위대한 발굴'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 고고학 역사상 '최악의 발굴'이라는 흑역사를 남겼다.

도굴당하지 않은 온전한 왕릉의 발견이라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취재진과 구경꾼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청동숟가락이 부러지고 귀중한 유산들이 훼손되었다. 이에 부담을 느낀 발굴단은 단 하룻밤, 17시간이라는 짧은 시간에 무덤 내부의 유물들을 자루에 쓸어 담듯 수습했다. 유물들이 어디에 어떤 상태로 놓여있었는지를 기록하는 실측도와 사진 자료를 제대로 남기지 못했다.
▲  무덤 주인이 누구인지를 밝혀주는 무령왕과 왕비의 묘지석. ‘영동대장군 백제사마왕’이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 국가유산청

당시 발굴단장이었던 김원룡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여론에 밀려 이틀 만에 무령왕릉 발굴을 끝낸 것은 내 생애 최대의 수치다"라고 뼈아픈 반성문을 남겼다. 이 실패는 한국 고고학계에 원죄이자 교훈으로 남았다. 이후 2년 뒤에 이루어진 경주 천마총 발굴에서는 철저한 현장 보존과 과학적 조사·기록을 도입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비싼 대가를 치르고 얻은 교훈 덕분이었다.

99.9% 순금으로 만든 왕과 왕비의 유물

백제 무령왕릉의 발굴은 한국 고고학 역사상 가장 치명적 오점을 남겼지만, 역설적이게도 무덤에서는 백제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엄청난 양의 유물이 출토됐다. 총 124종 5200여 점이 출토되었다. 이는 이집트 파라오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나온 5400여 점의 유물과 거의 맞먹는 숫자다. 이 중에서 17점은 국보로 지정되었다.

국보 중에서도 백미는 백제 예술의 정수로 꼽히는 순도 99.9%(24K)의 황금 유물이다. 왕과 왕비의 관 꾸미개를 비롯해 귀걸이, 목걸이, 금제 뒤꽂이는 6세기 백제의 압도적인 금세공 기술과 강력한 왕권을 증명하는 보물들이다. 이 유물들은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즉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는 백제 미학의 정수를 보여준다.

▲  국보 무령왕 금제관식
ⓒ 국가유산청

▲  국보 무령왕비 금제관식
ⓒ 국가유산청

무령왕릉의 대표적인 출토품 가운데 하나로 무령왕과 왕비의 머리맡에서 발견된 불꽃모양의 관꾸미개와 귀걸이, 목걸이 등은 사후에 만들어 넣은 부장품이 아니라 왕과 왕비가 생전에 직접 착용했던 애장품으로 밝혀졌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 따르면 "왕은 자줏빛 큰 소매가 달린 도포를 입고 금꽃으로 꾸민 검은 비단 모자를 썼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2007년 국립공주박물관에서는 무령왕 부부의 금제 장신구 64점에 대하여 비파괴 검사로 성분 분석을 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상당수 금제 장신구의 금 순도가 99.9%에 근접했다. 인동꽃 모양 관장식의 얇은 금판과 달개, 왕비의 목걸이와 귀걸이의 금 함유량 역시 99%에 가까운 순금이었다.

백제의 황금유물은 신라의 왕릉에서 출토된 황금유물과 비교해 볼 때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대체로 신라의 금관과 장신구들은 금과 은을 섞은 합금으로 만들어 금 함유량(70~80%)이 떨어진다. 반면 백제의 무령왕과 왕비는 노란빛이 영롱한 24K 순금을 선호했다. 백제와 신라의 문화적 차이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누파고구려 갱위강국"... 백제를 다시 위대하게

▲  국보 무령왕비 금 귀걸이
ⓒ 국가유산청

그렇다면 백제 무령왕 부부는 왜 이렇게 값비싼 황금으로 온몸을 치장했을까. 서기 475년으로 돌아가 보자. 고구려 장수왕이 3만 대군을 이끌고 백제 한성으로 쳐들어왔다. 104년 전 371년, 평양성 전투에서 백제 근초고왕에게 죽임을 당한 증조할아버지(고국원왕)의 원수를 갚고 한강 유역을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이른바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려는 '남진정책'의 일환이었다.

개로왕의 아들 문주는 급히 신라로 달려가 원군을 요청했다. 그러나 문주가 신라 원군 1만 명과 함께 한성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 개로왕은 이미 전사했고 한성은 고구려에 함락당한 뒤였다. 개로왕의 뒤를 이은 문주왕은 500여 년 이어온 도읍지 한성을 버리고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내려온다. 이른바 '웅진백제'의 시작이다.

그러나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웅진으로 천도한 지 3년 만에 문주왕(재위 475~477)은 귀족 세력에게 살해되었다. 뒤를 이은 어린 삼근왕(재위 477~479)은 15살에 요절하였다. 이후 동성왕(재위 479~501)마저 측근에게 암살되는 연쇄적인 비극 속에서 백제 왕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국가의 존립마저 위태로웠다.

▲  국보 무령왕 금 귀걸이
ⓒ 국가유산청

▲  귀걸이에 굽은옥이 달려있다
ⓒ 국가유산청

이 암흑기를 끝내고 '백제를 다시 위대하게' 만든 인물이 바로 백제 제25대 무령왕(재위 501~ 523)이다. 동성왕의 왕위를 계승한 무령왕은 '22 담로제(擔魯制)'를 시행하며 지방통치를 강화했고 내부를 안정시켰다. 고구려의 침략을 막아내고 국력을 회복했다. 남쪽으로는 가야 지역을 적극 공략하여 대가야 지역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마련했다.

드디어 웅진으로 천도한 지 46년째 되는 521년 겨울, 무령왕은 강력한 동맹국이었던 중국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누파고구려 갱위강국(累破高句麗 更爲强國)'을 선언하는 국서를 전달했다. "고구려의 침략을 여러 번 격퇴하고 나라를 다시 강하게 만들었다"라는 뜻이다.

이에 감명을 받은 양나라 무제는 무령왕에게 '사지절도독 백제제군사 영동대장군(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寧東大將軍)'이라는 높은 관작을 내렸다. 이는 무령왕릉의 묘지석에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으로 그대로 새겨져 기록의 정확성을 증명하고 있다.

▲  국보 무령왕 금제 뒤꽂이
ⓒ 국가유산청

당시 양나라를 방문한 백제 사신의 모습과 백제의 국력 회복 사실은 중국의 역사화인 '양직공도(梁職貢圖)'에 그림과 글로 상세히 기록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결국, 무령왕릉을 가득 채운 황금빛 유물들은 단순한 사치품이 아니었다. 그것은 "백제가 다시 위대해졌다"라는 강력한 메시지가 담긴 '외교적 선언'이었다. 또한 실추되었던 왕실의 권위를 되찾은 백제인들의 위대한 자신감이었다.
출처: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47/0002534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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