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막혀서 죽는다. 얼어 죽는다. 방사능에 과다 노출돼 죽는다. 다쳐서 죽는다. 그냥 얼마나 일찍 죽는지 실험하기 위해 죽는다….
28일 세계 최초로 한국에서 개봉하는 봉준호 감독 영화 ‘미키 17’에서 주인공 미키(로버트 패틴슨)는 17번 죽고 되살아난다. 미국 작가 에드워드 애슈턴의 원작 장편소설 ‘미키 7’(황금가지)에서 미키는 7번 죽었지만, 영화에선 10번이나 더 죽는 설정으로 바뀌었다.
미키17. 워너브러더스 제공
봉 감독이 미키의 죽는 횟수를 늘린 건 인간을 소모품으로 여기는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로 보인다. 위험한 임무나 생체 실험에 투입됐다가 죽으면 복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익스펜더블(expendable·소모품의)’한 비극을 극화한 것이다.
열차 칸에 따라 다른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계급 구조를 지적한 ‘설국열차’(2013년)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봉 감독도 지난달 20일 한국 간담회에서 “더 다양한 죽음을 통해 노동자 느낌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미키17. 워너브러더스 제공
● ‘똑똑한’ 역사 교사=>‘찌질이’ 마카롱 가게 주인
봉 감독이 위험한 업무에 노출된 노동자의 비애를 ‘블랙 유머’로 승화한 점도 눈여겨볼 점이다. 미키는 동료들로부터 “죽는 건 어떤 기분이냐”는 농담을 자주 받는다. 미키는 죽을 때마다 체념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데, 관객에게 묘한 웃음을 선사한다. 어쩐지 애잔하고 ‘웃픈(웃기고 슬픈)’ 미키의 모양새는 미국 아카데미 작품상 등 4개 부문을 휩쓴 영화 ‘기생충’(2019년)의 기우(최우식)를 떠올리게 한다.
원작 소설에서 미키의 직업은 역사 교사다. 인류가 외계 행성 ‘니플하임’으로 이주하는 이유를 깊이 고민한다.
AP 뉴시스
“사람들은 인류가 먼 옛날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최근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참 멍청했다고 떠들며 우리에게는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 자신을 속이고 있었다.”
또 인류가 니플하임으로 이주하는 과정을 ‘디아스포라(이민)’ 선상에서 생각한다.
“디아스포라를 설명할 방법이 달리 있을까? 테라포밍이나 예방 접종 걱정이 없고 지각이 있는 토착 생명체와 전쟁할 필요도 없는, 인류가 처음부터 보금자리로 삼아 왔던 단 하나의 행성을 떠나 니플하임 같은 장소로 이동하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AP 뉴시스
반면 영화에서 미키는 마카롱 가게를 창업했다가 망한 자영업자 출신이다. 익스펜더블이 실제로 무슨 일인지도 알지 못한 채 지원한다. 지나가는 여성에겐 “어떤 샴푸를 쓰냐”고 치근덕거릴 정도로 성에 집착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자신을 억압하고 조롱하는 지배자에겐 한마디도 못 하는 ‘찌질이’이기도 하다.
미키7. 황금가지 제공
● 노골적인 정치인 독재자 묘사엔 “트럼프 닮아” 평가도
소설에서 행성 이주를 이끄는 독재자 ‘마샬’은 군인처럼 냉정한 인물이다. 미키 7과 미키 8이 동시에 존재하는 ‘멀티플’ 상황을 인지한 뒤 “자네들은 괴물이야. 지금 자네들과 이야기하는 이유는 (둘을 죽이고) 아홉 번째 미키를 만들어야 할지 결정하기 위해서야”라고 단호히 말한다. 미키를 죽여야 하는 이유도 외계 생명체와의 교류 등 나름 합리적 이유가 있다.
미키와의 대화만 봐도 마샬은 굉장히 치밀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자네, 반스 자네 말이야, 지금 몇 번째 재생본이지?”(마샬) “음, 여덟 번째인 것 같은데요?”(미키) 마샬은 의문이 가득한 표정으로 눈썹을 치켜올렸다. “확실하게는 모르는 건가?”(마샬) “제 목 뒤에 몇 번째 생이라고 표시를 해 두는 게 아니니까요. 그리고 죽었을 때가 기억이 잘 안 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저더러 에잇이라고 하니까 그런 줄 아는 거죠.”(미키)
미키17. 워너브러더스 제공
하지만 영화에서 마샬(마크 러펄로)은 선동적이고 노골적인 정치인에 가깝다. “니플하임을 순수한 백색 행성으로 만들겠다”고 인종주의와 파시즘을 대놓고 드러낸다. 해외에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대한 풍자라는 평가가 나왔는데, 이에 대해선 호불호가 엇갈린다.
영화에선 마샬이 부인에게 잡혀 살며, 마샬 부인은 각종 소스에 집착하는 괴팍한 캐릭터로 묘사된 점도 소설과 다르다. 봉 감독은 16일(현지 시간) 독일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정치적 은유라기보단 소스를 정말 사랑하는 것으로 봐달라”며 “귀여운 독재자, 웃긴 독재자 부부”라고 설명했다.
미키17. 워너브러더스 제공
●영화 보기 전 알아야 할 ‘테세우스의 배’ 역설
영화에선 직접 언급되진 않지만, 이 작품의 모티브는 ‘테세우스의 배’(Ship of Theseus)다. 테세우스의 배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역설로 대상의 원래 요소가 교체된 후에도 그 대상은 여전히 동일한 대상인지에 대한 사고 실험이다.
소설에선 태세우스의 배 역설이 이렇게 설명된다. 이 부분을 읽으면 ‘수없이 재생산되는 미키가 동일인인가’라는 영화의 질문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테세우스는 나무로 만든 배를 타고 전 세계를 항해했어요. 그동안 배 여기저기가 망가지고 뜯어져 배를 고쳐야 했어요. 몇 년이 지나 집으로 돌아왔을 때 원래 선체를 구성했던 목재는 모두 교체되고 없었어요. 이 경우에 테세우스의 배는 출발할 때와 같은 배일까요? 아닐까요?” “멍청한 질문이네요. 당연히 같은 배죠.” “좋아요. 만약 배가 폭풍을 만나 산산조각이 나서 다시 항해를 시작하기 전에 완전히 새로운 배를 지어야 하면요? 그래도 여전히 같은 배인가요?” “아니요. 그건 완전히 다른 경우죠. 배 전체를 다시 지었다면 테세우스 2호가 되겠죠. 후속작인 셈이니까.” “그래요? 왜죠? 모든 부품을 하나씩 하나씩 다 뜯어고쳤을 때와 한 번에 배 전체를 다시 지었을 때가 어째서 다른가요?”
미키17. 워너브러더스 제공
스포일러라 언급할 순 없지만, 소설과 영화의 결말은 다르다. 소설은 ‘열린 결말’로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지점에서 끝난다. 그 결과 후속작 ‘미키7 : 반물질의 블루스’에서 미키의 이야기가 계속 진행된다.
이에 비해 영화는 ‘닫힌 결말’에 가깝다. 봉 감독이 ‘테세우스의 배’ 역설에 대한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고 볼 수 있다. 또 달라진 결말 덕에 영화 후반부엔 호쾌한 액션 장면이 관객을 즐겁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