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살 타계 오자와 세이지 “음악가, 나이 들며 향기” 주빈 메타·다니엘 바렌보임 등 80대 거장 수두룩
1927년생 지휘자 헤르베르트 블롬슈테트가 지난해 2월 뉴욕 링컨센터 데이비드 게펜홀에서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있다. (c)크리스 리
“음악가의 특별한 향기는 나이가 들면서 나타납니다.” 지난 6일 심부전으로 작고(향년 88)한 일본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가 했던 말이다. 그는 2010년 식도암 진단 이후 여러 건강 문제를 겪었지만, 지휘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다. 86살에 빈 필하모닉을 이끌고 일본을 순회했고, 87살엔 휠체어에 의지한 채 스승을 기려 만든 사이토 키넨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투혼을 보였다. 그는 ”이만큼 나이를 먹어도 경험을 통해서 변한다”며 “그게 어쩌면 지휘자란 직업의 한 특징일지도 모르겠다”고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와의 대담에서 말했다. 오자와는 동양 지휘자에 대한 서구의 뿌리 깊은 편견을 성숙한 인격과 엄청난 노력으로 극복한 지휘자였다. 그가 29년 동안 음악감독을 했던 보스턴 심포니는 ‘음악적 천재, 열정적인 멘토, 친절하고 사려 깊은 인도주의자’라고 추모했다.
‘정통 독일 사운드’를 계승하는 지휘자 마렉 야노프스키가 지난해 4월 케이비에스(KBS) 교향악단을 지휘했다. 케이비에스 교향악단 제공
오자와처럼 80~90대 고령에도 생물학적 법칙을 거스르며 새로운 통찰력으로 음악의 새 역사를 써내려가는 백전노장 지휘자들이 있다. 스웨덴 태생 헤르베르트 블롬슈테트(97)가 대표적이다. 미국 잡지 뉴요커는 지난해 ‘베토벤을 가장 활기 있게 연주하는 지휘자’로 그를 꼽았다. 뉴욕타임스는 지난해 2월 뉴욕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그의 공연을 두고, “96살에도 새로운 면모를 보였다”고 평했다. 그가 90살에 출시한 베토벤 교향곡 전집을 들어보면, 황혼기 노장의 여유롭고 느긋한 연주가 아니라 박력 있는 흐름에 경쾌한 리듬으로 튀어 오른다. 그는 2년 전 인터뷰에서 “지휘자의 정신적 에너지가 없으면 음악은 영혼을 잃는다”고 말했다. 온라인 클래식 사이트 ‘바흐트랙’은 지난해 ‘세상에서 가장 바쁜 지휘자 10위’로 그의 이름을 올렸다. 지난해 12월 낙상 사고를 당해 현재는 지휘 일정을 취소한 상태다. 2022년 도쿄에서 그가 지휘한 말러 교향곡 9번을 관람했다는 허명현 음악칼럼니스트는 “어떤 자기 과시나 욕심도 없고, 음악에 대한 헌신만 느껴졌다”고 기억했다.
지휘자 리카르도 무티가 2021년 빈 필하모닉을 이끌고 내한해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하는 모습. 세종문화회관 제공
지휘자는 장수 직업군에 속한다. 다른 직업군보다 38% 더 오래 산다는 통계도 있다. 가정의학 전문의 데일 앤더슨 박사(미국 미네소타대)가 저서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건강과 장수에 관한 비밀’에서 생명보험사의 조사를 인용하며 밝힌 수치다. 하루에도 몇 시간씩 두 팔을 휘젓는 특유의 동작이 심혈관 질환 위험을 낮춰 생존율을 높인다는 분석이었다. 그냥 오래 사는 데 그치지 않고 80~90 나이에도 성취를 보이는 지휘자들이 있다는 게 놀랍다.
최고령으로 지휘한 기네스 기록은 2022년 104살 나이에 미국 공군 악단을 지휘한 해군 장교 출신 지휘자 프랭크 에몬드(1918~2023)다. “1941년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 당일 펜실베이니아 전함에서 호른을 연주했던 음악가가 80년 뒤에도 군악대를 지휘했다”고 당시 미국 언론이 보도했다. 핀란드를 지휘 강국으로 이끈 94살 지휘자 요르마 파눌라는 지금도 세계 각국에서 찾아오는 지휘자들을 열정적으로 지도하고 있다.
지휘자 주빈 메타가 지난해 12월 엘에이(LA)필하모닉을 지휘해 피아니스트 조성진과 협연했다. 유튜브 갈무리
80대 지휘자들 중엔 왕성한 현역으로 뛰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올해 88살인 인도 태생 지휘자 주빈 메타는 지난해 12월 의자에 앉은 채 엘에이(LA)필하모닉을 지휘하며 피아니스트 조성진과 협연했다. 리카르도 무티(83)는 2025년 빈 필하모닉 신년 음악회 지휘봉을 잡는다. 그가 빈필 신년 음악회에 서는 7번째 무대다. 시카고 심포니를 이끌고 유럽을 순회 중인 그는 이달에만 11개 도시에서 14차례 공연한다.
이스라엘 태생 거장 지휘자 엘리아후 인발이 지난해 케이비에스(KBS) 교향악단을 지휘했다. 케이베에스 교향악단 제공
올해 내한 공연이 잡힌 지휘자들도 있다. 영국 지휘자 존 엘리엇 가디너(81)는 오는 10월 자신이 창단한 ‘혁명과 낭만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수도권 4개 공연장을 돌며 베토벤 9개 교향곡을 완주한다. 오는 6월 다니엘 바렌보임(82)이 ‘서동시집’(West-Eastern Divan)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내한할 계획이 잡혀있는데, 건강 상태에 따라 취소될 가능성이 있다. 지난해엔 엘리아후 인발(88), 마렉 야노프스키(85), 크리스토프 에센바흐(84) 등 ‘거장’ 지휘자들이 잇달아 케이비에스(KBS) 교향악단을 지휘했는데, 모두 꼿꼿이 선 자세로 지휘하며 흔들림 없는 연주를 들려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