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컬렉션 서울 전시 21일 개막 국립중앙박물관은 국보·보물 등 77점 전시 겸재 정선 '인왕제색도'·고려 불화 '천수관음보살도' 등 이 회장의 기술혁신·디자인 경영철학과 맞닿은 유물 선택 국립현대미술관은 국민 작가 34명 작품 58점 펼쳐 김환기 '산울림', 이중섭 '황소', 박수근 '유동' 등 한국 근현대미술사 주요 작품 선보여 벌써 한달치 관람 예약 마감 열기 뜨거워
겸재 정선 `인왕제색도`. [사진 제공 = 국립중앙박물관]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설치된 98인치 대형 화면에서 비가 개인 인왕산 풍경이 펼쳐졌다. 치마바위, 범바위, 수성동계곡 등 조선 진경산수화 걸작인 겸재 정선 '인왕제색도'가 그린 장소를 실제로 촬영해 그림과 교차 편집했다. 지난 4월말 고 이건희 삼성 회장 유족이 기증한 이 작품을 전시하기 위해서다. 76세 정선이 인왕산 구석구석을 자신감 있는 필치로 담아낸 최고 역작으로 이 회장의 1호 컬렉션이기도 하다. 1976년, 1992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조선총독부 청사에 있을 때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대여해 전시했던 작품이 이제 국립중앙박물관의 주요 소장품 목록에 올랐다.
20일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이건희 컬렉션'이 베일을 벗자 "작품 가치 뿐만 아니라 보존 상태도 초일류,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다음날 전시 개막을 앞두고 열린 두 기관의 언론 공개회에서 청동기부터 조선시대까지 주요 문화재와 유물, 한국 근현대 대표 작가 주요작들이 위용을 드러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인왕제색도'를 포함한 국보 12건과 고려 불화 '천수관음보살도'을 비롯한 보물 16건 등 45건 77점을 모은 '위대한 문화유산을 함께 누리다-고(故) 이건희 회장 기증 명품전'을 9월 26일까지 펼친다. 지난 4월 말 이 회장 유족이 기증한 9797건 2만1600여건 중 기술혁신과 디자인을 강조한 이 회장의 경영철학과 맞닿은 유물들을 골랐다.
국립현대미술관은 기증품 1488점 중 김환기 '여인들과 항아리', 이중섭 '황소', 박수근 '절구질하는 여인' 등 국민 작가 34명의 주요 작품 58점으로 구성한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명작'을 내년 3월 13일까지 연다.
이건희 회장이 국외에서 환수한 14세기 고려불화 '천수관음보살도'(보물)와 '수월관음도'도 이번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장에 걸려 있다. 그동안 고려 불화 1점 밖에 없어 연구하기 어려웠던 국립중앙박물관은 적외선과 X선 촬영을 통해 두 불화가 전통회화 채색기법 중 뒷면에서 칠하는 배채법을 사용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녹색의 석록, 푸른색의 석청, 백색의 연백과 붉은색의 진사 등 광물성 안료도 볼 수 있었다. 현존하는 유일한 '천수관음보살도'의 경우 44개 손에 들고 있는 달의 보매구슬·포도·약그릇·화살 등 다양한 물건을 확인했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노력과 결실을 보여주는 '석보상절 권11'(보물)과 '월인석보 권11·12'(보물), '월인석보 권17·18'도 전시한다. 15세기 우리말과 훈민정음 표기법, 한글과 한자 서체 편집 디자인 수준을 볼 수 있다. 생전에 이 회장은 "정보화와 관련해 본다면 금속활자는 세계 최초 하드웨어라고 할 수 있으며, 한글은 기막히게 과학적인 소프트웨어라고 할 수 있다"며 한글 전적류(고문서와 서적) 수집에 열을 올렸다고 한다.
국립중앙박물관 이건희 소장품 특별전.
이 회장의 백자 사랑을 보여주는 18세기 조선시대 '백자 청화 대나무무늬 각병'(국보), '백자 청화 산수무늬 병'(보물)도 전시장을 빛낸다. 대구 비산동 출토 청동기(국보), 덕산 출토로 전해지는 청동 방울(국보), 7세기 삼국시대 청동 보살(국보), 6세기 삼국시대 '일광삼존상'(국보), 14세기 고려 '대방광불화엄경 보현행원품'(국보), 가을밤 잠 못 이루는 선비를 그린 단원 김홍도 '추성부도'(보물) 등도 관람객을 맞는다.
이건희 소장품 특별전. [사진 제공 =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값을 매길 수 없는 무가지보(無價之寶) 이건희 컬렉션 진수를 볼 수 있으며,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한국에서 가장 그림 값이 비싼 작가들의 대작을 감상할 수 있다. 국내 미술품 경매 최고가 기록을 가진 김환기, 이중섭, 박수근, 장욱진, 유영국 등의 주옥 같은 작품들을 한 곳에 펼쳐 '한국 미술 별들의 전시'라고 할 만하다. 100억원에 육박해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할 수 없었던 김환기 푸른 점화 '산울림', 이중섭 '흰소', 박수근 '농악' '유동', 장욱진 '마을' 등이 존재감을 발한다. 호젓한 자연 속 초가집을 그린 한국 산수화 대가 이상범 8폭 병풍 '산고수장', 소정 변관식 '금강산 구룡폭'은 전성기 필력을 보여준다.
특히 작업실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조각가 권진규의 색채 부조 '곡마단' '코메디' '문' '작품 4'가 환조 '손' '자소상'과 함께 전시돼 있다. 김은주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그동안 권진규 부조 4점을 한 데 모을 기회가 별로 없었는데 이번 기증으로 성사됐다"며 "부조는 회화와 조각의 중간 매체로 권진규 만의 채색 미감을, 자기 만의 색을 찾아가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고대 벽화를 떠올리게 하는 박항섭 '가을', 입체주의 단순화를 시도한 김흥수 '한국의 여인들'도 주목할 만하다. 기존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에 박항섭 작품 2점, 김흥수 작품 4점 뿐이었는데 '이건희 컬렉션' 기증으로 보강하게 돼 연구를 강화하게 됐다. 김 학예연구사는 "이건희 컬렉션 덕분에 그동안 잘 몰랐던 작가들을 재발견하게 됐다"고 말했다.
두 전시 관람 사전 예약이 빠른 속도로 매진될 정도로 '이건희 컬렉션'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국립중앙박물관의 경우 19일 오전 0시에 예약 웹사이트를 열었는데, 12시간도 채 안 돼 한달 치 예약이 다 찼다. 국립중앙박물관 관계자는 "30분당 20명 예약을 받고 있다"며 "온라인 사전 예약을 통해서만 관람이 가능한데, 빠르게 매진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지난 12일부터 시간당 30명씩 사전 예약을 받기 시작했는데, 현재 8월 1일치까지 예약이 모두 찬 상태다. 국립현대미술관 관계자는 "2주치를 열어두었는데, 예약 오픈 수시간 만에 매진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며 "남은 전시기간의 예약은 다음 날이 되면 하루씩 열린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