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이 괴물 형상의 ‘소프트 조각’을 입고 일본 도쿄를 누비며 행인들의 반응을 유도한 ‘수난유감-내가 이 세상에 소풍 나온 강아지 새끼인 줄 아느냐’(1990) 퍼포먼스 기록(위 사진·작가 제공). ‘이불-시작’에서 퍼포먼스 영상 12점을 소개하는 블랙박스 전시장의 모습. 사진 홍철기·서울시립미술관 제공
도쿄 누빈 ‘기괴한 복장’ 퍼포먼스 ‘여성 몸’ 주제로 기존 질서에 도발
사진 기록·미공개 드로잉 등 선봬 전시장 로비엔 거대 풍선 설치도
1990년 이불은 촉수들이 덜렁거리는 기괴한 핏빛 조각을 입고 12일 동안 일본 도쿄 거리를 누볐다. 거리를 배회하며 행인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고, 경찰의 의심을 사기도 했다. 예측할 수 없는 반응을 주고받은 퍼포먼스의 제목은 ‘수난유감-내가 이 세상에 소풍 나온 강아지 새끼인 줄 아느냐?’ 시인 최승자의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1981)를 인용했다. “내 인생의 꽁무니를 붙잡고 뒤에서 신나게 흔들어대는 모든 아버지들아 내가 이 세상에 소풍 나온 강아지 새끼인 줄 아느냐.” 가부장으로 대변되는 기존 질서에 도발한 퍼포먼스는 ‘수난’을 겪는 여성의 상징이 됐다.
서울시립미술관이 열고 있는 ‘이불-시작’은 이젠 세계적 작가인 이불(57)의 초기 활동 시기인 1987년부터 10여 년간 집중적으로 발표된 ‘소프트 조각’과 ‘퍼포먼스 기록’을 돌아본다. 이불은 일찌감치 ‘몸’의 정치적 의미를 깨닫고 여성의 신체에 주목한 작가다. 여성의 몸과 젠더의 문제에서 남성 중심의 거대 서사를 해체하는 데로 나아간 작업 궤적 속에서 당대 여성 작가이자 청년 작가였던 이불의 비판적 작업을 ‘지금 여기’의 질문으로 다시 보고 읽는다.
이불 작가 사진 윤형문·호암재단 제공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한국 사회는 대중문화가 범람하고, 세계화의 물결이 일던 낙관의 시대였다. 하지만 여성 신체에 대한 남성적 시선은 공고했고, 남성중심적 세계관이 당연했으며, 그러면서도 자유로운 성 표현은 검열 대상이었다. 전시장의 비닐 장막을 걷고 거대한 블랙박스에 들어서면 영상 기록 12점이 관객을 맞는다. 벽면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30여년 전 시대적 풍경은 현재로 소환된다.
1989년 서울 동숭아트센터 소극장. 나체의 여성이 등산용 밧줄에 묶여 공중에 거꾸로 매달려 있다. 그의 입은 최승자의 시를 읊는다. “어느 한순간 세계의 모든 음모가 한꺼번에 불타오르고 우연히 발을 잘못 디딜 때 터지는 지뢰처럼 꿈도 도처에서 폭발한다.” 피 쏠린 얼굴에 눈은 뒤집혔다. 고통스러운 비명이 이어지자 관객들이 달려들어 여성을 끌어내린다. 이불의 퍼포먼스 ‘낙태’다.
온몸을 묶어 매달린 모습은 여성의 신체를 문제화하는 동시에 ‘본디지’로 상징되는 여성 신체에 대한 남성 판타지를 환기한다. 전시장에서 마주하게 되는 것은 충격적인 행위 자체만이 아니라 그를 관통하는 여러 시선들이다. 영상 속 퍼포먼스를 바라보는 사람들, 그리고 다시 그걸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이 교차하며 의미는 현재화한다. 지난해 ‘낙태죄’ 개정 논의에서 보듯, 여성의 몸이 여전히 ‘논란’인 오늘날에도 이불의 작품이 유효한 이유다.
이불이 겨누는 것은 공고한 가부장제였고, 그의 작업은 경계를 가로지르며 남성중심사회에 균열을 냈다. 1988년 첫 개인전 이후부터 사람의 움직임과 행위를 통해 ‘소프트 조각’ 개념을 시작했다. 기존의 ‘딱딱한’ 조각 전통에서 탈피해 천과 솜으로 된 그로테스크한 의상 조각이다. 남성적 시각으로 재현된 몸에 대한 거부다. 1990년부터 폭발적으로 발표한 일련의 퍼포먼스에선 근대를 상징하는 방독면, 군화 같은 소품이 반복해 등장하고, 원피스를 입은 소녀, 소복에 긴 머리를 풀어헤친 여자, 색동 한복을 입은 황후와 같은 캐릭터들이 대항적 주체로서 등장한다. 이 캐릭터들은 돌연 줄넘기를 하고, 그네를 타고, 괴성을 지르고, 웃음을 터트리고, 과장된 남성성이나 그로테스크한 여성성을 표현하는 몸짓으로 기존 문화 이데올로기를 환기하는 동시에 풍자한다.
1997년 뉴욕현대미술관에서 화려한 시퀸으로 수놓인 날생선을 전시하다 썩는 냄새로 작품이 철거당해 유명해진 ‘장엄한 광채’도 신체 조각의 연장선상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선 사진 기록 60여점, 미공개 드로잉 50여점, 오브제와 조각 10여점 등 풍부한 작품과 자료를 통해 이불의 퍼포먼스를 다채롭게 감상할 수 있다.
전시장 로비의 거대한 풍선은 이불의 풍선 모뉴먼트 연작 ‘히드라’를 재연한 것이다. 관객들이 펌프를 직접 밟아 바람을 불어넣을 수 있다. 여성 이미지가 인쇄된 괴물 형상의 풍선 조각이 부풀어 오르는 만큼 관객들의 질문도 커져갈 것 같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5월16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