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피아니스트 백건우. [사진 빈체로]
“좋은 곡이 정말 많잖아요. 그러니까 계속하지 않을 도리가 없어.” 14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의 무대 뒤. 피아니스트 백건우(75)가 감탄하듯 이런 말을 뱉었다. 그는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지휘 최희준)와 함께 피아노 협주곡 두 곡을 무대에서 연주하고 대기실로 향하는 참이었다. 클로드 드뷔시의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환상곡’, 벨라 바르토크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이었다.
두 곡 모두, 백건우가 자주 연주했던 곡이 아니다. 특히 드뷔시의 작품은 “난생 처음 연주해봤다”고 했다. 올해는 백건우의 피아노 인생 65주년. 1956년 열 살에 서울에서 해군교향악단(현 서울시립교향악단)과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며 데뷔했다. 15세에 미국으로 떠난 후 미국과 유럽의 숱한 무대에 서며 연주 곡목을 늘렸지만, 65년 기념 무대에서 그는 한번도 연주해보지 않은 곡을 선택했다.
드뷔시의 곡은 다른 피아니스트들도 자주 연주하지 않는 작품이다. 2018년 피아니스트 한상일(37)과 강남 심포니의 무대가 국내 최초의 연주 기록이다. 드뷔시가 28세이던 1890년 만든 작품으로 오케스트라와 함께하는 협주곡 형식이지만 보다 독자적인 프랑스 색채가 짙다. 백건우는 “초기 음악이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본인 색깔이 뚜렷하게 완성돼 있다”고 소개했다.
무대 위에서 백건우는 이 작품을 담담하게 해석했다. 다른 피아노 협주곡과 달리 이 음악은 피아노가 오케스트라를 뚫고 나와 혼자 돋보이지 않고, 오케스트라 중 하나의 악기처럼 전체의 음악에 기여할 뿐이었다. 백건우는 담백한 소리, 악보에 근거한 보수적 해석으로 음악을 끌고 나갔다. 독주자로서 튀어나오기 보다는 오케스트라와 합주를 위해 연주했다. 연주가 끝나고 백건우는 “드뷔시가 이 곡을 여러번 매만지고 고쳤다”며 “드뷔시는 혼자 두드러지게 보이도록 음악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평했다.
바르토크 작품에서도 백건우는 거대하게 과장하는 대신 소박하고 담백하게 음악을 표현했다. 보통은 음악을 밀어붙이며 표현하는 클라이맥스에서도 그는 힘 대신 소리 결의 변화로 음악의 굴곡을 표시했다. 이 곡 또한 백건우가 자주 연주하지 않는 작품이다. 그는 “젊은 시절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을 나이가 들면서 발견하게 된 음악들을 골랐다”며 “앞으로는 더 많은 게 보일 것 같다”고 했다.
백건우는 아내인 윤정희 배우와 관련한 국민청원으로 지난달 화제가 됐다. 윤정희 배우의 동생들이 지난달 초 청와대 국민청원에“알츠하이머에 걸린 윤정희가 보살핌 없이 파리 근교에 방치돼 있다”고 주장했다. 백건우는 “사실 무근이며 우리는 아주 평온하다”고 했고, 지난달 입국해 자가격리를 기간을 거친 후 지방 순회 무대에 올랐다. 이달 12일 서울 예술의전당까지 네 번의 무대에서 독일 작곡가 로베르트 슈만의 작품을 연주했다. 지난해 시작한 슈만 연주의 앙코르 무대였다.
14일 백건우는 윤정희와 관련해 더이상 언급은 하지 않았다. 일련의 사건들에 “괜찮다”고만 했다. 하지만 그가 이번 한국 무대에서 연주한 곡들은 묘하게도 작곡가와 그들의 아내의 사연을 담고 있다. 슈만의 작품들은 작곡가가 정신적 문제를 겪으며 쓴 음악들이다. 슈만은 정신분열, 환각, 환청에 시달리고, 강에 뛰어드는 자살 소동을 겪은 후 스스로 결정해 정신병원에 들어갔고 거기에서 생을 마쳤다. 백건우는 지난해 “자기 손으로 짐을 싸서 정신병원에 들어간 슈만이 이제 이해가 된다”고 했다. 아내 클라라와 유명한 러브 스토리를 남겼던 슈만은 아내 클라라와 자식들을 염려해 스스로 병원을 찾았다.
14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피아니스트 백건우. [사진 빈체로]
14일 연주한 바르토크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은 작곡가가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곡이다. 피아니스트 조은아는 공연의 프로그램 노트에서 “바르토크는 협주곡 3번의 ‘심장과 영혼’을 부인 디타라 여겼고 자신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녀가 이 작품의 저작권과 연주를 통해 생계를 유지할 수 있기를 바랐다”며 “부인을 향한 미안함과 애틋함이 투영된 작품”이라고 했다. 말년에 백혈병과 가난으로 고통받던 바르토크는 이 곡의 2악장에 ‘종교적인 아다지오(느리게)’라는 지시어를 붙여 베토벤의 후기 현악4중주 ‘병에서 나은 자가 신에게 바치는 거룩한 감사의 노래’와 연관지었다.
백건우는 7ㆍ11월 한국에서 모차르트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있다. 새롭게 모은 젊은 연주자들과 함께 모차르트 협주곡을 연주하는 무대다. 10월 27일엔 런던 필하모닉과 함께 베토벤 협주곡 3번을 연주한다.